학봉종택(鶴峯宗宅)

▸서후면 금계리 856번지

이 건물은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선생의 종택으로 당호(堂號)는  풍뢰헌(風雷軒)이다. 원래는 현 위치에 있었으나, 선생의
8대손인 김광찬(
金光燦) 공이 영조(英祖) 38년(1762)에 현 위치에서 100m 가량 떨어진 자리에 새로 종택을 건립하였다.
갑진년(1964)에 종택을 원래의 자리인 현 위치로 이건하였는데 이때 종택의 사랑채는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 소계서당(邵溪書堂)
으로 사용케 하
고 현 위치에 있던 소계서당을 종택의 사랑으로 사용하고 있다.

정침은 口자형의 평면을 취하고 있으나 최근에 좌측으로 아래채를 달아내어 전채적으로 보면 日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와 안채의 가
구(架構)는 모두 오량가(五梁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침의 우후측에는 3칸 규모의 사당(祠堂)을 배치하였으며,
학봉선생의 유물을 보관한 운장각(雲章閣)을 비롯하여 풍뢰헌, 문칸채등이 있으며
주위에는 토석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형성
하였다. 사당의 묘우(廟宇)에는 학봉선생의 신주(神主)를 봉안하고 있다.

이 건물은 경상북도 기념물 제112호(1995. 12. 1)로 지정되었다.


겸와고택(謙窩古宅)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 852번지

이 건물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인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공의 고택이다. 건축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200여년 된
건물로 추정된
다.

 

 

검제(金溪) 마을의 내력

청환(淸宦), 충의(忠義), 석학(碩學)이 줄을 이어 무수히 배출된 조선조(朝鮮朝)에 대표적인 유가(儒家)의 터전이 검제(金溪)이다.
안동(安東) 시내에서 서쪽으로 풍산(豊山), 예천(醴泉)을 잇는 국도를 따라 6km쯤 가다보면 옛날 공민왕(恭愍王)의 전설이 깃들어
있는 솔밤다
리(松夜橋)를 지나 북쪽 제방길을 따라 2km쯤 가면 만운촌(晩雲村)에 다다른다. 여기서부터가 바로 검제 마을이다.
태백산(太白山)에서 정기를 모아 흘러내린 힘찬 산맥이 북쪽에 학가산(鶴駕山) 준봉(峻峰)을 만들고 쏟아지듯 허리를 굽혀 다시
영산(靈山)인
천등산(天燈山)이 솟구치면서 문어발처럼 퍼져 제2봉인 주봉산(住鳳山)을 만들어 작은 산봉우리를 이어가며 순하고
수려(秀麗)한 줄기가 남쪽
으로 향하여 펼쳐졌다.

활기가 넘치는 능선을 등지고 동서로 길게 뻗어 참새가 줄을 타고 앉아있듯 적게는 다섯집, 많아야 10여 집이 옹기종기 모여서
마을이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소지명(所地名)도 많다. 만운(晩雲), 경광(鏡光), 어뜰(於坪), 효자문(孝子門), 김장골(金莊谷),
작장골(勺將谷), 미산(眉山), 텃골(
基谷), 동무지(東茂地), 부루골(扶老谷), 복당(福堂), 번계(樊溪), 뒷골(後谷), 단정(丹井),
사망(仕望), 알실(知谷), 가랑골(佳陰谷), 봄파리(春坡
), 올막골(溫幕谷), 능골(陵谷), 조부실(造火谷), 대골(大也谷), 덕거리(德閭里),
재일(在日), 독실(瓮谷), 봉림(鳳林) 등 20여개의 소촌(小村)을
일컬어 모두 검제라 한다.

흔히 한 곳에 모여 있는 마을과는 색다른 정취(情趣)를 느끼게 하는 고장이다. 이에 따라 예부터 “열두 검제는 말로 들을 검제이지
눈으로 볼 검
제는 아니다.” 라고 했듯이 한 눈에 마을 전체를 보고 감상할 수는 없다. 이렇게 늘어선 마을 앞을 가로질러 비단폭을
펼쳐놓은 듯 수정같이 맑
은 금계천(金溪川)이 흘러 풍수지리의 대지(大地)의 수리(數理)를 완벽하게 갖쳐 놓은뒤 저 멀리서 도도히
흐르는 낙동강(洛東江)
과 서쪽의 청성산(靑城山) 아래서 만나 합수(合水)하면서 절경을 창조해 놓았다.
우리나라에서 지방지(地方誌)로 기장 오래된 영가지(永嘉誌)는 이렇게 적고 있다. “속명을 금음지(今音地), 또는 금계(琴溪)라 한다.
안동부 서
쪽 20리 허에 있다. 옛부터 천년을 두고 무너지지 않는 땅(千年不敗之地)이라 불렀다.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이 선조

15년(1582)년에 임하(臨河)로부터 와서 살게 되면서 마을이 풍요로와 졌다. 한 줄기 시내가 마을 가운데를 뚫고 흐르며 나이 많은
노인들을 뫼시는 집이 많으니 주변(
一鄕)에서 노인촌이라 부른다(耆老比屋居之, 一鄕爲老人村).” 이렇듯 장수(長壽) 마을이기도 한
이 고장은 복지촌(福地村)으로 널리 알려져 부러움을 받아왔다.

한편 용암공(慵庵公, 金獻洛)이 쓴 금계지(金溪誌)는 마을 이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금계는 일명 금지(金池)라 한다.
구호를 금제(
琴堤)라 했는데, 방언의 훈(訓)은 검(黔)이라 해서 속되게 부르기를 검제(黔堤)라 했다. 혹은 이르기를 옛날에 시내가
나누어져 흘러 가운데가
열리면서 마을을 이루니 마치 거문고의 모양과 같아 금제(琴堤)라 불렀다라고도 한다. 뒷날 의성김씨
(義城金氏)가 번성하게 살게 되니 금계(金
溪)라 고쳤다. 부드러운 산에 둘려쌓여 껴안은 듯 기색(氣色)이 명미(明媚)한 한 줄기
시내가 가운데를 흐르니 여염박지 세전 천년불패지지(閭
閻撲地 世傳 千年不敗之地--마을이 가득하게 짜여 있으니 세상에 전하기를
천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는 땅)”라 했다.



금계에 처음 입향한 사람은 백죽당(栢竹堂) 배상지(裵尙志, 1351~1413)공으로 금계 용암(龍巖)에 정착하여 살았다. 흥해배씨
(興海裵氏)가 안동
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배상지의 아버지 배전(裵詮)공이 손홍량(孫洪亮, 1287~1379 一直人)공의 사위가 되어
처가 마을을 따라 안동으로 옮겨
와 살면서 부터이다. 이때가 바로 고려 말이다. 배상지가 금계에 입향하게 된 것은 안동 권씨
좌윤공파(左尹公派) 권희정(權希正) 공의 사위가
되었기 때문이다. 배상지 공의 아들 4형제는 모두 문과에 급제하였는데 장남 배권
(裵權)은 지평(持平), 차남 배환(裵桓)은 감사(監司), 삼남 배
남(裵楠)은 감찰(監察), 사남 배강(裵杠)은 이조정랑(吏曺正郞)에 올랐다.

안동권씨(安東權氏) 복야공파(僕射公派)의 예의판서(禮儀判書)를 역임한 권인(權靷)공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서후면 교리
(校里)에 정
착하여 송파(松坡)라 자호하고 은둔하였다. 그의 후손은 안동의 교리, 금계, 북후 도촌(道村), 봉화 유곡(酉谷)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권인 공의
6대손인 송암(松巖) 권호문(權好文, 1532~1587) 공은 퇴계문인으로 진사에 합격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만년에는 청성산(靑城山) 아래 연어헌(
鳶魚軒)을 짓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안동권씨 부정공파(副正公派)의 마애(磨厓) 권예(權輗, 1495~1549) 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이조판서를 역임하였는데, 그의 조부인
권자겸(權自
謙) 공이 배상지 공의 손서가 됨으로 금계에서 정착하게 되었다.

경주이씨(慶州李氏)로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한 이승직(李繩直) 공이 경기도 포천에서 살다가 배상지의 사위가 되면서 금계로
이거하였는데 이
승직 공의 아들 이시민(李時敏) 공은 서후 교동일대에 강력한 재지적(財地的) 기반을 구축하고 있던 권계경(權啓經,
權厚의 子) 공의 사위가 되
었다. 이시민 공의 아들 용재(慵齋) 이종준(李宗準, 1454-1498) 공은 문과에 급제하여 교리(校理)에
올랐으나 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戊
午士禍)에 연류되어 죽음을 당했고, 동생 눌재(訥齋) 이홍준(李弘準) 공은 봉화 내성(乃城)으로
옮겨가 은거하였다.

원주변씨(原州邊氏)의 변광(邊廣) 공은 권철경(權哲經, 權自謙의 子) 공의 사위가 되어 영주에서 옮겨와 금계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동
호(東湖) 변영청(邊永淸, 1516~1580) 공은 퇴계(退溪)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남원부사(南原府使), 대구부사
(大邱府使)를 역임하였고, 변영
청의 아들 변경장(邊慶長)은 생원이 되었으며, 변경장의 아들 간재(簡齋) 변중일(邊中一, 1575~
1660)은 진왜란 당시 효행(孝行)으로 정려(旌
閭)되었다.

진주하씨(晋州河氏)는 선산 일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으나 단계(丹溪) 하위지(河緯地, 1387~1456) 공이 단종 복위에
가담하여 멸문
지화를 당하다시피 하였으나 동생인 하소지(河紹地) 공은 사육신 이전에 사망하였기 때문에 그의 처자들은 화를 피하여
외향인 봉화에 칩거하
고 있다가 하소지의 아들 하원(河源)이 교동에 살고 있던 권개(權玠, 權啓經의 子) 공의 사위가 되어 하위지 공의
계자
(季子)로 교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안동장씨(安東張氏)는 장팽수(張彭壽) 공이 금계에 살고 있던 권응정(權應禎, 權啓經의 曾孫) 공의 손서가 됨으로 금계에 이주하여
왔으며, 그의 아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1564~1633) 공은 학봉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학행이 높았으며 뒤에 배상지, 이종준,
송소(松巢) 권우(權宇,
1552~1590) 공과 함께 경광서원(鏡光書院)에 배향 되었다.
장흥효 공의 딸은 석계(石溪) 이시명(李時明, 1590~1674) 공의 부인으로서 여류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으며, 그의 아들 존재(存齋)
이휘일(李徽
逸, 1619~1672) 공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 공과 손자 밀암(密庵) 이재(李栽, 1657~1730) 공이 모두
학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또 천등산(天燈山)에서 남쪽으로 뻗어 나와 금계 마을에 직접 맥을 잇고 있는 주봉산(柱鳳山)에는 안동권씨의 시조 권태사(權太師,
權幸) 공의
묘소가 있고, 천등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내린 줄기에 안동김씨의 시조 김태사(金太師, 金宣平) 공의 단소(壇所)가 있으며
천등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내린 상산(商山)줄기에는 안동장씨의 시조 장태사(張太師, 張吉) 공의 단소(壇所)가 위치하고 있다.



이렇듯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길지(吉地)에 터를 잡은 의성김씨(義城金氏)입향조(入鄕祖)는 학봉(鶴峯) 선생이다. 공의 휘(諱)는
성일(誠一)이
요, 자(字)는 사순(士純)이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받았으며, 학봉(鶴峯)은 호(號)이다. 시조(始祖)는 의성군
(義城君) 휘 석(錫)으로
학봉의 십구대조이며, 첨사공(詹事公) 용비(龍庇)는 십일대조이다.

 

의성김씨가 안동부에 처음 터를 잡게 된 것은 첨사공의 오대손인 전서공(典書公, 金居斗)과 공의 아들 만호공(萬戶公, 金洊) 부자이다.
전서공은
이성계(李成桂)의 역성혁명(易姓革命)으로 고려(高麗)가 망하고 조선조(朝鮮朝)가 개국되자 “나라가 바뀌었으니 나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邦之
革矣 我安適歸)”하고 아들 만호공과 함께 지금의 안동시 율세동(栗世洞) 일명 방적동(邦適洞)에 자리를
잡았다.

 

그뒤 만호공의 증손이며 학봉의 증조부인 망계공(望溪公, 金萬謹)이 임하현의 해주오씨(海州吳氏)와 혼인하여 처가(妻家) 고장인
내앞(川前)으
로 옮겨 새 터전을 마련하였다. 망계공의 손자인 청계공(靑溪公, 金璡)은 이곳을 중심으로 사방에 광범위한 지역에
자손만대의 큰 계획(爲子孫
萬年大計)을 확립한 선조(先祖)이다. 공은 아들 오형제를 두었는데, 장남 약봉공(藥峯公, 金克一)은 문과
(文科)에 급제하여 내자시정(內資寺正)
을 역임하고 내앞에 터를 잡고, 차남 귀봉공(龜峯公, 金守一)은 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여
자여도(自如道) 찰방(察訪)을 지내고 일직현(一直縣
) 구미(龜尾)에 터를 잡았다가 뒤에 내앞으로 귀향하였으며, 삼남 운암공(雲巖公,
金明一)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하현 신덕(新德)에 자리를 잡
았으며, 사남이 바로 학봉공으로 이곳 검제에 터전을 마련 하였고,
오남 남악공(南嶽公, 金復一)은 문과에 급제하고 창원부사(昌原府使) 등을 역
임하고 예천현(醴泉縣) 용문면(龍門面) 구계리
(九溪里)에 터를 잡아 각각 분가하였다.

 

학봉공이 검제로 이거(移居)하게 된 시기는 선조(宣祖) 15년(1582, 壬午) 7월이다. 공은 퇴계선생(退溪先生, 李滉)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아 선조
원년(1568)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이 부제학(副提學)에 이르렀고, 선조 13년(1580)에 청계공이 별세하였으며, 삼년상을
마친 공은 그 해 나라
에서 사간원(司諫院) 사간(司諫)과 이어 성균관(成均館) 사예(司藝)의 관직을 내리고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고
(不就) 그 해 처가(妻家)가 있는 검
제로 옮겼던 것이다.

 

공은 어버이를 잃은 슬픔이 채 가시지 않아 이곳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그로부터 5년 뒤 공이 50살이 되던 해인 선조 20년(1587)에
마을의
서쪽 끝 청성산(靑城山, 일명 星山) 절경의 중허리에 석문정사(石門精舍)를 건립하고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일화가 있다. 공은 송암
(松巖) 권호문(權好文) 공과 학문을 논하며 두터운 교우(交友)로 사귀었는데 청성산이 송암공의 소유였다.
하루는 공이 이곳 절경의 산수를 보
고 송암공에게 “이곳에다 정사를 지어 후진양성을 하였으면 좋겠다.”고 하니 송암공이 선뜻 산
중허리를 잘라 “위쪽의 산을 줄 터이니 정사를
짓도록 하오.” 라고 허락하여 석문정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정사의 남쪽에
돌 두 개가 마주보며 우뚝 서 있어 석문(石門)이라 이름 하였다.

공이 정사를 더욱 넓히고 후진양성에 전념하려던 선조 22년(1589) 12월에 조정에서 일본(日本)의 보빙(報聘=우호로 타국이
방문했을 때의 답례
사절)을 논하자 적정(賊情)을 측량키 어려워 모두들 기피하였을 때 공에게 일본 통신부사(通信副使)가 차배
(差拜)되어 일본을 다녀왔었다. 그
다음해인 선조 23년(1590) 3월 3일 낙향하였다가 그로부터 2년 뒤인 선조 25년(1592)에 임진왜란
(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경상도(慶尙道) 관찰사(
觀察使)로 적을 맞아 사력을 다하여 싸우다 진중(陣中)에서 병을 얻어 진주성
(晋州城)에서 순사(殉死)하니 향년이 56세였다. 뒤에 이조판서(吏
曹判書)에 증직되고
문충공(文忠公, 道德博聞 曰 文, 危身奉上 曰 忠)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이 검제로 이거한지 사백여년, 그동안 학덕이 높은 많은 후손들을 배출하여 대과(大科=文科) 출신자가 10명, 소과(小科=司馬試)
출신자가 25
명, 은일(隱逸), 또는 음직(蔭職)이 32명, 항일(抗日) 독립운동수훈자(獨立運動受勳者)가 16명에 이르고 있다.
이렇듯 학문과 애국 애족의 정신이 충만한 검제(金溪), 이 마을 출신들은 현재에도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어 선대(先代)에
우국충절(
憂國忠節)의 정신을 손색없이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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