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과(文科) 급제(及第) 출신자(出身者)

 

김성일(金誠一) (中宗33年 戊戌 1538 - 宣祖26年 癸巳 1593)

선생의 휘(諱)는 성일이고 자(字)는 사순(士純)이며, 호(號)는 학봉(鶴峯)이다.
안동시 임하면 내앞(川前)에서 청계(靑溪) 김진(金璡) 공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총명한 재질과 탁월한 천품을 타고났으며 불의에 굴하지 않았다. 퇴계(退溪) 선생 문하에서 수학하여 행고(行高),

학정(學精)함을 칭찬하여 요순(堯舜)이래 옛 성현들이 차례로 전한 심학연원(心學淵源)을 적은 병명(屛銘)을 받았다. 27세(1564) 때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하고 선조 1년(1568)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고 이어서 검열

(檢閱), 대교(待敎)를 거쳐 1572년 봉교(奉敎)가 되어 노산묘(魯山墓)를 노릉(魯陵, 端宗의 墓)으로 봉식할 것과 사육신(死六臣)의

관작을 회복시켜 그들의 후손을 녹용할 것을 진언하였으며 군덕(君德)과 시폐(時弊)를 논의하였다.

 

정언(正言), 수찬(修撰)을 거쳐 1575년 이조(吏曹),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하고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한번은 선조가 경연(經筵)에서 

 

“경들은 짐(朕, 임금 자신)이 전대의 제왕과 비교해 봤을 때 어떤 임금과 비슷하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하문하였다.

그러자 모든 신하들이 “요순(堯舜)과 같은 임금입니다.” 며 성군에 비유하였다.

그러나 학봉은 기탄없이 “요순도 될 수 있고 걸주(桀紂)도 될 수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선조는 안색이 굳어지면서 “요순(聖君)과 걸주(暴君)가 같은 반열이라고 보는가?” 고 추궁하였다. 학봉은 안색하나 변하지

않고 “잘 생각하면 성인이 되고 생각하는 것을 잊으면 미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剋念作聖罔念作狂) 그러므로 전하께서는

천자가 고명하시니 요순 같은 성군이 되시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스로 어질다는 것을 믿고 올바른 말을 간하는 신하를

 멀리하시는 폐단이 있으시니 이것은 걸주가 망하게 된 까닭이라 하겠습니다.” 이 말에 선조는 얼굴빛이 붉어지면서

자세를 바꾸자 장내의 분위기가 자못 살벌해졌다.

 

경연에 참여했던 모든 신하들은 어떤 날벼락이 떨어질지 몰라 벌벌 떨면서 전전긍긍하였다.

이 때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선생이 나아가 아뢰었다.

“두 사람의 말이 모두 옳습니다. 요순으로 대답한 것은 임금을 인도하는 말이요, 걸주에 비유한 것은 경계하는 말로

다 임금을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라고 설명하자 선조도 얼굴의 노기가 사라지며 “술을 내리게 하라.”고 하고

학봉의 직언을 오히려 가상히 여겼다.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역임하면서 범안간쟁(犯顔諫諍)을 꺼리지 않고 불의와 부정을 탄핵하니

사람들이 “전상호(殿上虎, 大闕안의 호랑이)” 라 불렀다.

 

선조 10년(1577) 사은사(謝恩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가서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위해 노력하였다.

 

1597년에는 함경도 순무어사(巡撫御使)가 되어 민정을 살피고 이듬해 4월에 돌아왔다.

 

1580년 6월에 청계공의 상고를 당하여 고향에 내려왔으며, 2년 후 금계리로 이거하였다.

1583년에는 이어서 황해도 순무어사가 되어 해이해진 군정과 과중한 부역으로부터 도민을 소생케 하였다.

 

이듬해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부임하여 대곡서원(大谷書院)을 창건하여  동방오현(東邦五賢)을 향사하였으며 주자서절요

(朱子書節要), 자성록(自省錄)을 편집 간행하여 학풍을 진작 시켰다. 잠시 벼슬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석문정사(石門精舍)를

 짓고 경학을 강론하고 후진을 양성하였다.

 

선조 23년(1590) 일본에 통신부사(通信副使)로 가서는 직절(直節) 불굴(不屈)하였으며 다시 대사성(大司成)이 되고 홍문관 부제학

(副提學)에 제수되었다.

 

1592년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경상도 초유사(招諭使)로 임명되어 민중의 궐기를 호소하는 초유문을 지어

각 고을에 보내 의병의 궐기와 지원을 극력 종용하였다. 관군과 의병을 잘 조화시켜 진주성 대첩을 거두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진주대첩은 비록 김시민(金時敏) 장군의 힘껏 싸운 공이라고는 하지만 그 싸움을 지휘하고 독려한 것은 전적으로 선생의 치밀한

계획과 지휘로 경상우도는 물론 멀리 호남 의병까지 와서 적극 지원하는 가운데 진주 민중이 얻어낸 임란 초기의 빛나는 대승리였다.

 

그러나 선조 26년(1593)에 도내 각 고을에 전투를 독려하던 중 과로로 병을 얻어 공관에서 순국하였다.

선생이 돌아가시자 선생을 의지하던 사민들은 가슴을 치고 통곡하며 “하늘이 우리 어버이를 빼앗아 갔다.” 고 하였다.

 

묘소는 안동부 북쪽 가수천(佳樹川) 오향(午向)에 모셔졌다. 선생의 묘소앞에 세운 묘방석(墓傍石)에는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이

 “충성은 사직에 남아있고 이름은 죽백(竹帛)에 실려 있다. 덕행과 훈업은 모두 백대에 밝게 빛날 것이다.” 라고 기록하였다.

 

퇴계(退溪) 선생의 적전고제(嫡傳高弟)로써 성리학에 조예가 깊어 주리론(主理論)을 계승하여 영남학파의 중추적 구실을 하였으며

학통은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밀암(密庵) 이재(李栽)--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정재(定齋) 유치명

(柳致明)--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으로 이어져 그 연원이 도도히 흐르고 있다.

그리고 성리학적 윤리와 가치를 직접 실천해 나가는데 온 힘을 기울었다. 선생의 생애와 저술 및 시문학을 살펴볼 때 이러한 실천적

 경향은 당시의 대내외적 모순에 대응하여 자연히 애민, 애국적 사상과 민족주의적 의식으로 나타났다. 또한 선생의 사고와 현실인식의

 방향은 늘 민중의 생활현실에 기초하고 있었다.

 

현종(顯宗) 5년(1664)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선생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지고 인조(仁祖) 27년(1649)에 학봉집(鶴峯集)이

편찬되었고, 저서로 상례고증(喪禮考證), 해사록(海?錄) 등이 있다.

안동에 호계서원(虎溪書院), 임천서원(臨川書院), 사빈서원(泗濱書院), 영양(英陽)의 영산서원(英山書院), 의성(義城)에 빙계서원

(氷溪書院), 청송(靑松)에 송학서원(松鶴書院), 진주(晋州)에 경림서원(慶林書院), 하동(河東)에 영계서원(永溪書院), 나주(羅州)의

경현서원(景賢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선조(宣祖) 38년(1605)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녹훈되고 숙종(肅宗) 5년(1679)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증직되고,

문충공(文忠公)의 시호(諡號)를 내렸고 시주(諡註)는 “도덕이 높고 학문을 널리 들었다.(道德博聞)하여 문(文)이라 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 하여 충(忠)”이라 하였다.

 

 

김시권(金是權) (宣祖 16年 癸未 1583 - 仁祖 21年 癸未 1643)

자(字)는 자중(子中)이고 호(號)는 봉파(鳳坡)이다.
학봉의 손자로 세마(洗馬) 김집(金潗)의 둘째 아들로 아홉 살에 아버님 명령으로 백씨(金是樞)를 따라서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

공에게 글을 배웠고, 또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공에게도 수학하였다. 선조38년  (1605) 진사시에 오르고 인조 8년(163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그해 6월에 성균관 학유(學諭)가 되고 성균관 박사(博士), 전적(典籍)에 올랐다가 영동현감(永同縣監)이 되었다.

다시 공조좌랑(工曹佐郞), 예조(禮曹),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백씨가 하세하고 90노모가 계시므로 봉양하기 위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였다.

공의 나이 11살에 조부이신 학봉선생이 진주성에서 돌아가시자 세마공이 즉시 분상(奔喪)을 떠나는데 가슴을 치고 통곡하기를

“우리는 할아버님을 다시 못 뵈올 것이니 어찌 살 것이며 또 아버님이 천리 길을 분상하시는데 중로에 적병이 득실거리는데 어찌

무사히 가실 수 있을는지 내 비록 어리나 아버님을 따라서 사생을 같이 하리라.” 하고 모두가 만류하여도 한사코 듣지 않고 동행하여

가다가 금소역(琴韶驛)까지 가서 세마공이 말에서 내려 효유(曉諭)하여 겨우 돌려보냈다. 뒤에 관구(棺柩)가 돌아오니 애호반벽

(哀號攀壁)하여 공의 출천지 효성에 모두 감탄하였다.
인조 9년(1631) 10월에 세마공이 병환으로 계시니 주야로 시탕하면서  하늘에 축원하였으나 마침내 상고를 당하니 몇 번을 기절하고

대렴(大斂)한 후 관구에 머리를 부딫혀 선혈이 낭자하여도 깨닫지 못하였다.

장사 후에는 묘소 옆에 여막(廬幕)을 짓고 삼년을 지내면서 사흘마다 집에 돌아와 어머님께 문안하고 갔으나 집안일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향년(享年)이 61세이고 8대손 김진국(金鎭國)이 유사(遺事)를 쓰고 김시임(金時任, 豊山人으로 鳳坡公의 甥姪)
공이 행장
(行狀)을 짓고 소암(所庵) 이병원(李秉遠) 공이 묘갈명(墓碣銘)을 지었다.

 

김응렴(金應濂) (肅宗 36年 庚寅 1710 - 英祖 37年 辛巳 1761)

자는 성희(聖希)이다. 학봉의 삼자 김굉(金?)의 오대손으로 김이도(金以鍍)의 장남이다.
영조 26년(1750)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다. 창방(唱榜)할 때 영조께서 명지(名紙)에 쓰기를 “금년 과거에는 명현의 후예를 얻게 되니

 나의 마음이 즐겁고 가상히 여기노라.” 하였다. 벼슬이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이르렀고, 향년이 52세이다.

 

김기찬(金驥燦) (英祖 24年 戊辰 1748 - 純祖 12年 壬申 1812)

자는 덕여(德汝)이고 호는 동곽(東郭)이다.
학봉의 8대손으로 김주훈(金柱勳)의 차자이다. 기우가 청수하고 성품이 관홍하며 효우가 지극하여  향당에 신망이 두터웠다.

정조 1년(1777)에 문과 동당시에 급제하여 홍문관(弘文館) 정자(正字), 박사(博士), 전적(典籍)을 지내고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태천현감(泰川縣監), 이조정랑(吏曹正郞),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

유고(遺稿)가 전하며 향년 65세에 하세하니 인암(忍庵) 권상규(權相圭)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진형(金鎭衡) (純祖 1年 辛酉 1801 - 高宗 2年 乙丑 1865)

자는 덕추(德錘)이고 호는 겸와(謙窩), 또는 청사(晴蓑)이다.
학봉 선생의 10대손으로 청송(聽松) 김종수(金宗壽)의 삼자이다. 천자가 호탕하고 기절이 강직하고 총명이 절인하였다.

철종(哲宗) 1년(1850)에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전적(典籍),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을 거쳐 홍문관(弘文館) 교리(校理)가

 되었다. 철종 4년(1854)에 부수찬(副修撰)이 되고 이해 7월에 이조판서 서기순(徐箕淳)의 배공편당(背公偏黨)의 죄를 독소(獨疏)로

탄핵하여 서(徐)의 심복인 남종순(南鍾淳)의 보복소에 몰려 함경도 명천(明川)으로 유배되었다가 2개월 만에 해배되어 북도의 명승

칠보산(七寶山)을 관상하고 북천가(北遷歌)를 지었다. 이 가사는 유배문학으로 국문학사에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철종 6년(1856)에 다시 부교리가 되고 수찬, 응교(應敎),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을 거쳐 장악원정(掌樂院正)에 올랐다.

철종 8년(1858)에 문과 중시(重試)에서 병과 제1인으로 급제하여 당상계(堂上階)에 오르고 동부승지(同副承旨)를 거쳐 초산도호부사

(楚山都護府使)가 되었다.

고종 1년(1864) 정월에 시폐를 열거하여 상소하였더니 반대당들이 조대비(趙大妃)에 고하여 엄지(嚴旨)로 전라도 고금도(古今島)로

절도 안치되었다. 다음 해 윤 5월 22일에 적소에서 하세하니 향년이 65세였다.

시문(詩文)에 능하여 시고(詩稿) 4권이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김진우(金鎭右) (純祖 5年 乙丑 1805 - 哲宗 12年 辛酉 1861)

자는 국원(國元)이다. 학봉의 10대손으로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기수(金驥壽)의 장자이다.
순조 34년(1834)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를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서 사헌부 지평(持平), 사간원 정언,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다시 공조참의(工曹參議)가 되고 동부승지가 되었다가 우부승지(右副承旨), 좌부승지가 되고 다음해

영월부사(寧越府使)에 제수되고 다시 우부승지가 되었다. 향년 57세에 하세하니 긍암(肯庵) 이돈우(李敦禹)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진의(金鎭懿) (哲宗 7年 丙辰 1856 - 丙寅 1926)

자는 미경(美卿)이고 호는 학운(鶴雲)이다. 학봉의 10대손으로 김평수(金平壽)의 5자이다.
용모가 괴걸(怪傑)하고 기개가 있었다. 고종 19년(188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감(秘書監)에 올랐다. 향년이 72세였다.

 

김용락(金龍洛) (正祖 19年 乙卯 1795 - 高宗 1년 甲子 1864)

자는 여운(汝雲)이고 호는 춘고(春?)이다.  학봉의 11대손으로 유유헌(悠悠軒) 김진국(金鎭國)의 차자이다.
순조 19년(1819)에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정언, 헌납(獻納), 홍문관 수찬(修撰), 교리, 사헌부 장령, 종부시정(宗簿寺正)을 지내고

병조참의(兵曹參議), 참지(參知), 승정원 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외직으로는 율봉찰방(栗峯察訪), 은산현감(殷山縣監) 등을 지냈다.

 향년이 70세이고 유고(遺稿)는 학운세고(學雲世稿)에 실려있고 족제(族弟)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달연(金達淵) (純祖 9年 己巳 1809 - 哲宗 7年 丙辰 1856)

자는 이활(而活)이고 호는 병오(甁塢)이다. 학봉의 11대손으로 김진락(金鎭洛)의 장자이다.
천자가 영명하고 총명하였다. 헌종 6년(1840)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이 승문원 정자를 거쳐 사헌부 지평에 이르렀다.

향년이 48세였다.

 

김홍락(金鴻洛) (哲宗 14年 癸亥 1863 - 癸未 1943)

자는 우경(羽卿)이고 호는 모계(某溪)이다. 학봉의 11대손으로 김진억(金鎭?)의 장자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서산 선생이 돌아가시니 심상(心喪) 삼년을 입으시고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
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고종 31년(1894)에 식년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시강(侍講)이 되고 비서감랑(秘書監郞)이 되어 통정계
(通政階)에
 올랐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문을 닫고 글 읽기와 저술(著述)로 지냈다. 문집이 전하며 향년이 76세이고 인암
(忍庵) 권상규
(權相圭)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사마과(司馬科, 生員, 進士) 급제자(及第者)

 

김성일(金誠一) (中宗 33年 戊戌 1538 - 宣祖 26年 癸巳, 1593)

자는 사순(士純)이고 호는 학봉(鶴峯)이다. 증 판서인 청계(靑溪) 김진(金璡)의 넷째 아들이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선조 1년 (1568)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行績은 文科條에 參照)

 

김시추(金是樞) (宣祖 13年 庚辰 1580 - 仁祖 18年 庚辰 1640)

자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단곡(端谷)으로 학봉의 장손이다.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 문하에서 수학하여 선조 34년(160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광해 13년(1621)에 영남 유생들이 모여서

간신 이이첨(李爾瞻)을 죽이라고 소(疏)를 올리는데 공을 소수(疏首)로 추대하니 이이첨이 대간(臺諫)을 시켜 탄핵하여 일이 장차

불측하게 되어가려 하였으나 공은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연다라 제4소까지 올렸다.

인조 2년(1624)에 안기찰방(安奇察訪)에 제수되고 정묘년(1627)에 호란(胡亂)이 일어나니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인조 8년(1630)에 의금부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 인조 16년(1638)에 교관(敎官)이 되어 소를 올려 군덕(君德)을 힘쓰고 시폐를

구하고 산성을 축조하고 관방(關防)을 엄히하라는 내용의 수천언의 소를 올렸다.

정의에 용감하고 명리(名利)에 담박(淡泊)하여 거처하는 마루에 풍뢰헌(風雷軒)이라 편액하고 “징분여최산(懲忿如?山) 질욕여진학

(窒慾如塡壑)”  이라고 크게 써서 벽에 붙이고 항상 좌우명으로 삼았다. 향년이 61세이고 유고(遺稿)가 전한다.

여서(女?)인 졸재(拙齋) 유원지(柳元之)공이 유사(遺事)를 쓰고 한성우윤(漢城右尹)인 귀와(龜窩) 김굉(金)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시권(金是權) (宣祖 16年 癸未 1583 - 仁祖 21年 癸未 1643)

자는 자중(子中)이고 호는 봉파(鳳坡)이다. 학봉의 둘째 손자이다.
선조38년(1605)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 8년(1630)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行績은 文科條에 參照)

 

김시강(金是?) (宣祖 20年 丁亥 1587 - 孝宗 7年 丙申 1656)

자는 자거(子擧)이고 호는 행촌(杏村)으로 학봉의 셋째 손자이다.
호양(湖陽) 권익창(權益昌)과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경지(經旨)를 강론하여 사문(師門)의 장허(?許)를

 받았다. 인조 2년(162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유문(遺文)은 많았으나 전하지 않고 향년이 56세이다.

 

김시절(金是?) (宣祖 30年 丁酉 1597 - 仁祖 22年 甲申 1644)

자는 자고(子高)이고 학봉의 손자로, 애경당(愛景堂) 김집(金潗)의 제4자로 태어나 숙부인 종사랑(從仕郞) 김굉(金?)에게 출계하였다.

 경당 장흥효 문하에서 수학하여 인조 20년(164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당시 태학(太學, 成均館)에 올라 문학과 명망이 높았으나

 자손이 침체되어 사적이 전하지 못한다. 향년이 48세였다.

 

김명기(金命基) (仁祖 15年 丁丑 1637 - 肅宗 26年 庚辰 1700)

자는 용휴(用休)이고 호는 병간(甁艮)이다.
학봉의 증손인 김전(金?)의 차자로 태어나 숙부인 김섭(金燮)에게 출계하였다. 십여세에 고모부인 졸재 유원지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또 목재(木齋) 홍여하(洪汝河)의 사위가 되어 목재에게도 수학하였다. 숙종 3년(1677)에 진사시에 오르고, 숙종 19년(1693)에 감사

(監司)의 천으로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문장이 간명고준(簡明高峻)하고 필력(筆力)이 있었다. 향년이 64세이고,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몽수(金夢洙) (肅宗 5年 己未 1679 - 英祖 29年 癸酉 1776)

자는 노수(魯?)이고 호는 구재(懼齋)이다. 학봉의 오대손인 춘곡(春谷) 김이현(金以鉉)의 삼자이다.
외조부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더욱 학문에 힘쓰고 언행의 실천 공부에 힘썼다.
숙종 41년(171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향년이 75세이고 이회춘(李會春)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숭덕(金崇德) (英祖 8年 壬子 1732 - 英祖 52年 丙申 1776)

자는 이용(利用)이고 호는 재성재(齋省齋)이다. 학봉의 오대손인 죽소(竹所) 김양현(金良鉉)의 삼자이다.
영조 30년(1754)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명륜당에서 영조왕의 인견을 받았는데 영조께서 “퇴파독립(頹波獨立)의 기개를 가졌다.”라고

 우악한 포장(??)을 받았다. 향년이 45세이고 유고는 본가에 있으며, 강고(江皐) 유심춘(柳尋春) 공이 행장과 묘갈명을 지었다.

 

김주운(金柱雲) (肅宗 33年 丁亥 1707 - 正祖 13年 己酉 1789)

자는 창국(昌國)이고 호는 교전옹(校前翁)이다. 학봉의 6대손인 김몽해(金夢海)의 차자이다.
경전과 사서에 숙독정사(孰讀精査) 하였으며 소주(小註)까지도 성송(成誦)하였다. 영조 1년(1725)에 아버님을 따라서 선산(善山)

교동(校洞)으로 우거하였다.

영조 20년(174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산 연계당(蓮桂堂) 뒤에 문회재(文會齋)란 집을 지어 부사(府使) 이장우(李章祐)와 같이

 사림의 강학하는 장소로 창건하고 규약을 정하고 여러 사림의 추대로 재장(齋長)이 되어 사풍(士風)을 많이 진작케 하였다.

향년이 83세이고 유고가 본가에 있으며 족제(族弟) 귀와(龜窩) 김굉(金) 공이 행장을 지었다.

 

김용찬(金龍燦) (景宗 4年 甲辰 1724 - 正祖 11年 丁未 1787)

자는 천용(天用)이고 호는 경독재(耕讀齋)이다. 학봉의 7대손인 김주진(金柱震)의 장자이다.
미목(眉目)이 수려하고 성품이 단정하였다. 영조38년(176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명리(名利)에 뜻을 두지 않고 알실골(知谷)에

집을 짓고 경독재라 이름하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여 여러 아우들과 향내의 준수한 자제들을 모아서 학문을 강론하였다.

문충공 속집(續集)과 연방세고(聯芳世稿)의 편집을 위하여 십년의 긴 세월을 두고 종중의 노성(老成)들과 고심 모집하여 간행하기

까지 정력을 다 하였다.
향년이 64세이고 유고로 용학강의(庸學講義) 1권과 저서가 많았으나 화재로 소실되고 문집 1책이 간행되었다.

해은(海隱) 강필효(姜必孝)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완찬(金宛燦) (英祖 34年 1758 - 純祖 33年 癸巳 1833)

자는 이선(而善)이다. 학봉의 7대손인 김주옹(金柱?)의 차자로 태어나 재종숙 교전옹 김주운에게 출계하였다.
정조 16년(179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문학과 덕행이 높아 향내에 존경을 받았다. 향년이 76세이다.

 

김정찬(金晶燦) (英祖 40年 甲申 1764 - 憲宗 7年 辛丑 1841)

자는 옥여(玉汝)이다. 학봉의 7대손인 김주옹의 3자이다. 정조 22년 (1798)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향년이 78세이다.

 

김종수(金宗壽) (英祖 37年 辛巳 1761 - 純祖 13年 癸酉 1813)

자는 일노(一老)이고 호는 청송(聽松)이다. 학봉의 9대 주사손(?嗣孫)으로 김광찬(金光燦)의 장자이다.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수학하여 정조 16년(1792)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정조 21년(1797)에 정릉참봉(靖陵參奉), 효릉참봉(孝陵參奉)을 거쳐 선릉(宣陵) 직장(直長)이 되고 형조좌랑(刑曹佐郞)이 되었다.

순조 3년(1803)에 연풍현감(延豊縣監)을 5년이나 역임하여 많은 치적을 남겼다. 향년이 53세이고 유고는 본가에 소장되어 있고,

장손 서산 김흥락(金興洛)공이 행장을 짓고 정재 유치명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인수(金鱗壽) (正祖 8年 甲辰 1784 - 哲宗 2年 辛亥 1851)

자는 겸노(謙老)이고 호는 농와(聾窩)이다. 학봉의 8대손인 동곽(東郭) 김기찬(金驥燦)의 차자이다.
순조 27년(1827)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명성이 향내에 진동하였다. 그 후 학문에 전념하여 후진의 교도(敎導)에 힘썼다.

향년이 68세이고 유고 1책이 간행되었다.

 

김양수(金楊壽) (正祖 9年 乙巳 1785 - 憲宗 15年 己酉 1849)

자는 응노(鷹老)이고 호는 만서(晩棲)이다. 학봉의 8대손인 분와(奮窩) 김호찬(金虎燦)의 장자이다.
헌종 15년(1849)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그해에 하세하니, 향년이 65세 이다. 평생을 학문에 전념하여 힘써 실행하였고,

향당에 덕망이 높았으며 특히 윤리에 돈독하였다.

 

김갱수(金?壽) (正祖 19年 乙卯 1795 - 哲宗 1年 庚戌 1850)

자는 팽노(彭老)이다. 학봉의 8대손인 김규찬(金奎燦)의 장자이다.
헌종 1년(1835)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향내에 명성이 높았다. 향년이 56세이다.

 

김건수(金健壽) (純祖 4年 甲子 1804 - 高宗 3年 丙寅 1866)

자는 문서(文瑞)이고 호는 지암(止庵)이다. 학봉의 8대손인 김백찬(金百燦)의 장자이다.
정재 유치명 문하에서 수학하여 사문(師門)의 장허(?許)를 받고 용학(庸學), 사칠설(四七說), 예설(禮說) 등에 대하여 사제간에

왕복 토론이 많았다. 헌종 3년(183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다. 만년에 연고덕소(年高德邵)하여 덕망이 높으니

각처 유궁강회(儒宮講會)에 주석이 되어 많은 유생을 훈육 지도하였다. 향년이 63세이고 유고는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김기수(金基壽) (純祖 16年 丙子 1816 - 憲宗 11年 乙巳 1845)

자는 계온(季溫)이다. 학봉의 8대손인 김상찬(金相燦)의 차자이다.
헌종 10년(1844)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다음해에 하세하니 향년이 30세이다. 일찍이 문명이 높았다.

 

김진국(金鎭國) (英祖 51年 乙未 1775 - 憲宗 1年 乙未 1835)

자는 덕함(德涵)이고 호는 유유헌(悠悠軒)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항수(金恒壽)의 장자이다. 천성이 준엄하고 인후하였다.

일찍이 과거에 뜻을 두지 아니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읽고 사색하고 침식을 잊었다.

순조 27년(182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순조 31년(1831)에 정릉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었다. 면재(?齋) 이병운(李秉運) 공이

공에게 말하되 “上有名祖하고 下有能子하고 旣得小成하고 又得一命하니 世之無憂者는 眞某翁乎인저” (위로는 이름난 조상(鶴峯)이

 있고 아래로는 유능한 자식(龍洛)을 두어 이미 작은 성공을 하였는데, 또 일명(一命, 貞陵參奉)을 얻었으니 세상에서 근심없이 사는

 사람은 참으로 모(某)이다.) 라고 하였다.

만년에 집 곁에 유유헌 정자를 짓고 후진을 추장교도(推?敎導)하고 유림사업에 정력을 기울렸다.

향년이 61세이고 유고는 학운세고(學雲世稿)에 실려 있고 손자인 서전(書田) 김병모(金秉模)가 묘지를 지었다.

 

김진익(金鎭翼) (正祖 13年 己酉 1789 - 憲宗 2年 丙申 1836)

자는 정여(鼎汝)이고 호는 미산(美山)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락수(金洛壽)의 차자이다.
헌종 1년(1835)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재분(才分)이 초일(超逸)하여 문장이 유창하고 성망(聲望)이 대단하였으나 불행히도

소과에 오른 다음해 향년 48세로 하세하였다.

 

김진로(金鎭魯) (純祖 18年 戊寅 1818 - 憲宗 11年 乙巳 1845)

자는 중언(仲彦)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정수(金鼎壽)의 5자이다.
헌종 9년(1843)에 아우 김진한(金鎭漢)과 연방(聯榜)으로 생원시에 합격하니 이름이 향내에 떨치었다. 그러나 그 명석한 자질을

펴지 못하고 2년 후 향년 28세로 요서하니 향내에서 애석하게 여겼다.

 

김진한(金鎭漢) (純祖 21年 辛巳 1821 - 憲宗 10年 甲辰 1844)

자는 계언(季彦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정수의 6자이다.
천자가 영명하여 절인의 재조(才操)를 가졌다. 헌종 9년(1843)에 숙형 김진로와 연방으로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다음해에 24세로 요서하였다.

 

김경락(金景洛) (純祖 34年 甲午 1834 - 壬子 1912)

자는 오연(五衍)이고 호는 운포(雲圃)이다. 학봉의 10대손인 승지를 역임한 김진우의 차자이다.
아홉 살에 효경(孝經)과 소학을 읽고 19세에 유곡(酉谷)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문하에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읽었는데

권공께서 의정식박(義精識博)이라고 장허(?許)하였다. 고종 11년(1874)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종형(宗兄) 서산(西山) 문하에서

 다시 학문에 정진하였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자 시를 지으면서 울분한 심회를 풀었다.

인암(忍庵) 권상규(權相圭) 공이 묘갈명을 짓고 족질인 중재(重齋) 김황(金榥) 공이 묘지를 지었다.

 

김승락(金承洛) (憲宗 1年 乙未 1835 - 高宗 36年 己亥 1899)

자는 사흠(士欽)이고 호는 병서(屛西)이다. 학봉의 10대 주사손인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의 차자이다.
백형인 서산 문하에서 경학에 전념하였으며, 고종 28년(1891)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향년이 65세이고 유문은 본가에 소장되어 있다.

 

김제모(金濟模) (純祖 32年 壬辰 1832 - 高宗 22年 乙酉 1885)
자는 군필(君弼)이고 호는 경서(鏡西)이다. 학봉의 11대손인 김도연(金道淵)의 장자이다.
천자가 단아하고 언론이 준정하며 문사(文詞)가 섬부(贍富)하여 태학(太學, 成均館)에 있을 때 동료들이 모두 두려워 하였다.
고종 19년(1882)에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주자서(朱子書)와 퇴계서(退溪書)를 정독하고 친족간에 화목하였다. 향년이 54세이다.

 

일천(逸薦), 음직(蔭職) 출신자(出身者)

 

김  집(金  潗) (明宗 13年 戊午 1558 - 仁祖 9年 辛未 1631)

자는 활원(活源)이고 호는 애경당(愛景堂)으로 학봉의 장자이다.
어릴때부터 침중하고 관후하였다. 13세 때에 아버님을 따라서 퇴계선생 문하에 가서 배우니 선생이 용모와 거지(擧止)를 보고

학봉에게 이르기를 “이 아이가 다른 날에 반드시 후덕한 장자(長子)가 될 것이다.” 하시고 친히 옥조(玉藻), 구용(九容), 사무사

(思無邪), 무자기(毋自欺) 등 어구를 써서 주고 소학을 가르쳐 주었다. 학봉이 교훈이 엄하고 법도가 있어서 자제들에 칭허(稱許)하는

 일이 없으나 공은 능히 집을 이어 받을 것이라 하였다.

일찍이 과거 준비를 하니 학봉께서 “어찌 기필하기 어려운 과거에 노심할 것이 있나.” 하므로 그만 거두고 효제의 도와 가정일을

관리하기에 마음을 썼다. 선조 28년(1595)에 추은의 특전으로 창락도(昌樂道) 찰방(察訪)으로 불렀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선조 30년

(1597)에 세자(世子) 익위사(翊衛司) 세마(洗馬)가 되어 잠시 서울에 가서 사은숙배(謝恩肅拜)하고 돌아왔다. 향년이 74세이고 유고는

 본가에 소장되어 있으며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  혁(金  ) (明宗 22年 丁卯 1567 - 宣祖 26年 癸巳 1593)

자는 호원(浩源)으로 학봉의 차자이다.
젊을 때부터 기략(氣略)과 여력(?力)이 있어 능히 삼백근 무게의 종(鍾)을 높이 들 수 있었다. 천성이 호매(豪邁)하여 글 읽는

사이에도 활도 쏘고 거문고를 다루어 강개(慷慨)한 풍도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학봉께서 부월(斧鉞)을 잡으시고 남도로 내려 갈 때 따라 갔었다. 공은 군중에 2년 동안이나 아버님을 모시고

 풍찬노숙(風餐露宿)하면서 갖은 간난(艱難)을 다 겪었다. 선조 26년(1593) 4월에 학봉께서 국사에 전념하던 중 병을 얻어

진주공관에서 돌아가시니 공도 병을 얻어 수일 후 뒤따라 하세하니 그때 나이 27세였다. 종현손(從玄孫)인 고우(古愚) 김이옥

(金以鈺) 공이 행장을 지었고, 종12대손인 연단실(鍊丹室) 김주덕(金周悳)이 묘지를 지었다. 선무랑(宣務郞)의 직첩(職牒)을 받았다.

 

김  잠(金  潛) (宣祖 11年 戊寅 1578 - 仁祖 10年 壬申 1632)
자는 종원(宗源)으로 학봉의 4자이다.
일천(逸薦)으로 대구교수(大邱敎授)를 지냈다. 향년이 55세이다.

 

김  명(金  溟) (宣祖 25年 壬辰 1592 -               )
학봉의 7자이다.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일천으로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역임하였다.

 

김시추(金是樞) (宣祖 13年 庚辰 1580 - 仁祖 18年 庚辰 1640)

자는 자첨(子瞻)이고 호는 단곡(端谷)으로 학봉의 장손이다.
선조 34년(1601)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인조 8년(1630)에 음직으로 의금부(義禁府) 경력(經歷)에 제수되었다.(行績은 司馬科를 參照)

 

김  규(金  ?) (宣祖 35年 壬寅 1602 - 肅宗 11年 乙丑 1685)

자는 광정(光庭)이고 호는 정근재(定?齋)이다. 학봉의 장증손이고 단곡 김시추의 장자이다.
지극한 효우의 행실과 몸가짐이 모두 향내에 모범이 되어 향당에서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달려가서 다 해결을 하였다.

경당 장흥효 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음직으로 빙고(氷庫) 별제(別提)에 제수되고 숙종 7년(1681)에 수직(壽職)으로 가선대부

(嘉善大夫)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에 올랐다.

만년에는 많은 노성(老成)들이 모여서 금서(琴書)를 즐기고 또 경광(鏡光) 남쪽 시냇가에 별업(別業)을 짓고 여사헌(如斯軒)이라

이름하고 자제들의 공부하는 곳으로 삼았다. 향년이 84세이고 유고가 전한다.

 

김명기(金命基) (仁祖 15年 丁丑 1637 - 肅宗 26年 庚辰 1700)

자는 용휴(用休)이고 호는 병간(甁艮)이다. 학봉의 증손인 김전(金?)의 차자로 태어나 숙부인 선교랑(宣敎郞) 김섭(金燮)에게

출계하였다.
숙종 3년(1677)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숙종 19년(1693)에 감사의 천으로 의금부 도사(都事)가 되었다.  (行績은 司馬科를 參照)

 

김중렴(金重濂) (英祖 21年 乙丑 1745--純祖 3年 癸亥 1803)

자는 경주(敬周)이다. 학봉의 4자 김잠(金潛)의 현손인 김이릉(金以?)의 3자이다.
음직으로 용양위(龍?衛) 호군(護軍)에 제수되었다.

 

김호찬(金虎燦) (英祖 37年 辛巳 1761 - 純祖 17年 丁丑 1817)

자는 병여(柄汝)이고 호는 분와(奮窩)이다. 학봉의 7대손인 암재(巖齋) 김중주(金中柱)의 장자이다.
어릴 때부터 종조부 재성재(齋省齋) 김숭덕(金崇德) 문하에서 글을 배우고 21세 때에는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대산이 하세한 뒤에는 소산(小山) 이광정(李光靖)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학문이 뛰어나 일천으로 영릉참봉

(英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57세이고 유고가 전하고 있으며 정재 유치명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종수(金宗壽) (英祖 37年 辛巳 1761 - 純祖 13年 癸酉 1813)
자는 일노(一老)이고 호는 청송(聽松)이다. 학봉의 9대 주사손으로 김광찬(金光燦)의 장자이다.
정조 16년(1792)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음직으로 형조좌랑(刑曹佐郞), 연풍현감(延豊縣監)에 제수되었다.  (行績은 司馬科에 參照)

 

김병수(金炳壽) (憲宗 4年 戊戌 1838 -高宗 39年 壬寅 1902)

자는 계문(季文)이고 호는 석림(石林)이다. 선교랑(宣敎郞) 김섭(金燮)의 증손인 진사(進士) 김숭덕(金崇德)의 증손이다.
일천으로 감역(監役)에 제수되었다.

 

김진국(金鎭國) (英祖 51年 乙未 1775 - 憲宗 1年 乙未 1835)

자는 덕함(德涵)이고 호는 유유헌(悠悠軒)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항수(金恒壽)의 장자이다.
순조 27년(1827)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순조 31년(1831)에 천으로 정릉참봉(貞陵參奉)에 제수되었다.  (行績은 司馬科에 參照)

 

김진화(金鎭華) (正祖 17年 癸丑 1793 - 哲宗 1年 庚戌 1850)

자는 성관(聖觀)이고 호는 탄와(坦窩)이다. 학봉의 10대 주사손으로 청송 김종수의 장자이다.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영탈(潁脫)하였다. 13살에 귀와(龜窩) 김굉(金) 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논어를 배웠다. 순조 28년(1828)에

음직으로 창릉참봉(昌陵參奉)에 제수되고 선공감(繕工監) 봉사(奉事), 사재감(司宰監) 직장(直長), 장악원(掌樂院) 주부(主簿),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에 제수되고, 순조 33년(1833)에 아산현감(牙山縣監)을 지내고 헌종 1년(1835)에 진산군수(珍山郡守)가

되고 헌종 3년(1837)에 청송부사(靑松府使)를 거쳐 헌종 12년(1846)에 무장현감(茂長縣監)을, 헌종 14년(1848)에 능주목사(綾州牧使)

에 올랐다. 향년이 58세이고 유고가 전하며 장자인 서산옹(西山翁)이 행장을 짓고 이재(?齋) 권연하(權璉夏)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진응(金鎭應) (哲宗 2年 辛亥 1851 - 癸酉 1933)

자는 순경(順卿)이고 호는 만포(晩浦)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평수(金平壽)의 4자이다.
음직으로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자학(字學)에 정통하여 정운옥편(正韻玉篇)을 전부 암기하였다. 향년이 83세이다.

 

김진운(金鎭雲) (哲宗             - 辛酉 1921)

자는 우형(雨衡)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춘수(金春壽)의 차자이다.
음직으로 사헌부(司憲府)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

 

김진하(金鎭河) (哲宗 7년 丙辰 1856 - 癸酉 1933)

자는 청일(淸一)이다. 학봉의 9대손인 김승수(金承壽)의 장자이다.
음직으로 홍릉참봉(弘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78세이다.

 

김흥락(金興洛) (純祖 27年 丁亥 1827 - 高宗 36年 己亥 1899)

자는 계맹(繼孟)이고 호는 서산(西山)이다. 학봉의 11대 주사손으로 탄와 김진화의 장자이다.
다섯 살 때 재종숙인 유계(酉溪) 김진용(金鎭龍)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18살에 정재 유치명 문하에서 논어와 가례(家禮)를 수학하였고,

 대학혹문(大學或問), 정존재잠(靜存齋箴), 사칠변(四七辨) 등을 질의하여 물으시고 또 태극도설(太極圖說), 경재잠집설(敬齋箴集說)

 등 의문나는 것을 문의하였다.

음직으로 고종 4년(1867)에 인릉참봉(仁陵參奉)에 제수되고, 이어서 사옹원(司饔院) 주부(主簿), 경상도(慶尙道) 도사(都事)에

제수되고, 고종 19년(1882)에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고종 31년(1894) 7월에 특지로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제수되었으며, 8월에 다시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학문연구와 전통수호에 전념하였으나 일제(日帝)가 국모를 시해하고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닥치자 영남 유림의 대표자로서 분연히

 일어나 전국 최초의 항일의병인 갑오의병을 일으켰으며, 을미의병, 병신의병을 총지휘하여 큰 전과를 올렸다.

또한 서산학파의 선비들은 의리론으로 무장되어 많은 독립운동가가 배출되었다.

퇴계학의 연원정맥(淵源正脈)을 계승한 대유학자로서 우리나라 유학의 마지막 유종(儒宗)이었으며 영남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을

받아 조정에서 여러번 관직을 내렸으나 벼슬에는 뜻이 없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향년이 73세이고 성재(省齋) 권상익(權相翊) 공이 행장을 짓고, 향산(響山) 이만도(李晩燾) 공이 묘갈명을 지었다.

 

김부락(金富洛) (純祖 32年 壬辰 1832 - 高宗 39年 壬寅 1902)

자는 윤환(潤煥)이고 호는 파수(芭?)이다. 학봉의 4자인 김잠의 9대손인 김진학(金鎭學)의 장자이다.
일천으로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겸 오위장(五衛將)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71세이다.

 

김상락(金商洛) (憲宗 6年 庚子 1840 - 高宗 42年 乙巳 1905)

자는 대여(大汝)이다. 학봉의 10대손인 김진호(金鎭浩)의 장자이다.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66세이다.

 

김원락(金元洛) (憲宗 15年 己酉 1849 -           )

자는 사경(士敬)이고 학봉의 10대손인 김진근(金鎭根, 金應濂의 5代孫)의 장자이다.
일천으로 능참봉(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김병락(金柄洛) (哲宗 1年 庚戌 1850 - 丙寅 1926)

자는 언직(彦直)이고 호는 취석(翠石)이며 초명은 김호락(金浩洛)이다. 학봉의 10대손인 김진만(金鎭萬)의 장자이다.
풍도가 청수(淸秀)하고 언론이 창달(暢達)하였다. 시문의 품격이 청고하여 문주(文酒)의 회석(會席)에 나가면 일좌(一座)가 풍동

(風動)하였다.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음직으로 기자전(箕子殿) 참봉이 되었다. 임천서원(臨川書院)을 이건할 때

묘우(廟宇)의 단청(丹靑)과 치목(治木), 정원배치 등 모든 일에 많은 심혈을 기우렸다. 향년이 77세이다.

 

김운락(金雲洛) (哲宗 1年 庚戌 1850 - 高宗 39年 壬寅 1902)

자는 사영(士英)이고 호는 추당(追堂)이다. 학봉의 10대손인 김진경(金鎭經)의 장자이다.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음직으로 주사(主事)에 올랐다. 향년이 53세이다.

 

김창락(金昌洛) (哲宗 7年 丙辰 1856 - 高宗 36年 己亥 1899)

자는 덕오(德悟)이고 학봉의 10대손인 김진성(金鎭聖, 金柱雲의 玄孫)의 3자이다.
음직으로 통정(通政)에 제수되었다.

 

김정락(金?洛) (哲宗 14年 癸亥 1863 - 丁巳 1917)

자는 미숙(美叔)이고, 학봉의 10대손인 김진두(金鎭?)의 계자이다.
음직으로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55세이다.

 

김장락(金璋洛) (高宗 5年 戊辰 1868 - 甲申 1944)

자는 정우(定于)이고 학봉의 10대손인 김진백(金鎭伯이 장자이다.
음직으로 참봉에 제수되었고, 향년이 77세이다.

 

김태락(金泰洛) (高宗 10年 癸酉 1873 - 辛巳 1941)

자는 성겸(聖謙)이고 호는 가산(可山)이다. 학봉의 10대손인 김진희(金鎭憙)의 차자이다.
천자가 강명(剛明)하고 단아하였다. 약관에 서울에 가서 궁내부(宮內府) 주사(主事) 겸 산릉도감(山陵都監)이 되고 일류 명사들과

 교류하여 명성이 높았다. 향년이 69세이다.

 

김선모(金善模) (憲宗 13年 丁未 1847 - 庚午 1930)

자는 형도(亨道)이고, 학봉의 4자인 김잠의 10대손인 동지중추부사 김부락(金富洛)의 장자이다.
음직으로 표훈원(表勳院) 참봉에 올랐다. 향년이 84세이다.

 

김순모(金淳模) (哲宗 14年 癸亥 1863 - 癸亥 1923)

자는 순명(淳明)이고, 학봉의 4자인 김잠의 10대손인 김병연(金秉淵)의 장자이다.
음직으로 표훈원 참봉에 올랐다.  향년이 61세이다.

 

김성모(金聖模) (高宗 5年 戊辰 1868 - 甲申 1944)

자는 명언(明彦)이고 호는 벽송재(碧松齋)이다. 학봉의 4자인 김잠의 10대손인 김병연의 3자이다.
음직으로 홍릉참봉(洪陵參奉)에 제수되고 다시 승정원 비서승(秘書丞)에 올랐다. 향년이 77세이다.

 

김세동(金世東) (高宗 7年 庚午 1870 - 壬午 1942)

자는 성칙(聖則)이고 호는 심대(心臺)이며, 초명은 김좌동(金佐東)이다. 학봉의 11대손인 취석 김병락의 장자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어릴 때부터 명성이 높았다.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수학하고, 음직으로 사릉참봉(思陵參奉)에 제수되었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비분강개하여 국권을 회복하려고 독립운동에 참여하여 두 차례나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

향년이 73세이다.

 

김성동(金聖東) (高宗 10年 癸酉 1873 -           )

자는 여임(汝臨)이고 초명은 김긍모(金兢模)이다. 학봉의 11대손인 김영락(金英洛)의 장자이다.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음직으로 주사에 올랐다.

 

김성모(金成模) (高宗 19年 壬午 1882 - 戊申 1968)

자는 계선(繼善)이고 호는 죽파(竹坡)이다. 학봉의 11대손인 김성락(金聲洛)의 계자이다.
고종 40년(1903)에 음직으로 주사에 올랐다. 향년이 87세이다.

 

김용환(金龍煥) (高宗 24年 丁亥 1887 - 丙戌 1946)

자는 여현(汝見)으로 김응걸(金應杰)의 장자로 태어나 백부인 김응모(金應模)에게 출계하니 학봉의 13대 주사손이다.
조부인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음직으로 혜릉참봉(惠陵參奉)에 제수되었다. 향년이 60세이다. 족제 김일대(金日大)가

묘갈명을 지었다.

 

 

수 직 (壽 職)을 받은 분

 

  해마다 정월에 팔십세 이상의 관원(官員) 및 백성에게 은전(恩典)으로 주던 벼슬로 실직(實職)이 아닌 명예직이다.

 

김시학 (선조 33년 경자 1600 - 숙종 15년 기사 1689) 향년 90세
金是(宣祖 33年 庚子 1600 - 肅宗 15年 己巳 1689) 享年 90歲

       자자정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학봉 손, 김잠(대구교수) 장자
       字子正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鶴峯 孫, 金潛(大邱敎授) 長子

 

김  규 (선조 35년 임인 1602 - 숙종 11년 기축 1685) 향년 84세
金  ? (宣祖 35年 壬寅 1602 - 肅宗 11年 己丑 1685) 享年 84歲

       자광정 호정근재 수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김시추(의금부경력)장자
       字光庭 號定?齋 壽嘉善大夫 龍?衛副護軍. 金是樞(義禁府經歷)長子

 

김계기 (인조 11년 계유 1633 - 숙종 45년 기해 1719) 향년 87세
金啓基 (仁祖 11年 癸酉 1633 - 肅宗 45年 己亥 1719) 享年 87세

       자덕보  수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김귀(증장악원정)차자
       字德甫  壽折衝將軍 龍?衛副護軍.      金(贈掌樂院正)次子

 

김유기 (인조 27년 기축 1649 - 영조 6년 경술 1730) 향년 82세
金由基 (仁祖 27年 己丑 1649 - 英祖 6年 庚戌 1730) 享年 82歲

       자부경  수돈용교위 증가선대부.  김잠(대구교수)증손 김위장자
       字富卿  壽敦勇校尉 贈嘉善大夫.  金潛(大邱敎授)曾孫 金?長子

 

김성월 (효종 10년 기해 1659 - 영조 21년 을축 1745) 향년 87세
金聖鉞 (孝宗 10年 己亥 1659 - 英祖 21年 乙丑 1745) 享年 87歲

       자성로 호엄라  수가선대부 용양위부호군.  김후기(종사랑)장자
       字聖魯 號嚴懶  壽嘉善大夫 龍?衛副護軍.  金厚基(從仕郞)長子

 

김이감 (현종 8년 정미 1667 - 영조 22년 병인 1746) 향년 80세
金以鑑 (顯宗 8年 丁未 1667 - 英祖 22年 丙寅 1746) 享年 80歲

       자명중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계기(용양위부호군)차자
       字明仲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金啓基(龍?衛副護軍)次子

 

김이기 (현종 8년 정미 1667 - 영조 28년 임신 1752) 향년 82세
金以錡 (顯宗 8年 丁未 1667 - 英祖 28年 壬申 1752) 享年 82歲

       자중숙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잠(대구교수)현손 김필기계자
       字仲叔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金潛(大邱敎授)玄孫 金弼基系子

 

김이명 (현종 15년 갑인 1674 - 영조 32년 병자 1756) 향년 83세
金以銘 (顯宗 15年 甲寅 1674 - 英祖 32年 丙子 1756) 享年 83세

       자사일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잠현손 김유기(수가선)장자
       字士一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金潛玄孫 金由基(壽嘉善)長子

 

김이릉 (영조 11년 을묘 1735 - 순조 25년 을유 1825) 향년 91세
金以? (英祖 11年 乙卯 1735 - 純祖 25年 乙酉 1825) 享年 91歲

       자약로  수가선대부 .   김잠현손 김서기(증공조참판)장자
       字躍爐  壽嘉善大夫 .   金潛玄孫 金胥基(贈工曹參判)長子

 

김몽속 (숙종 22년 병자 1696 - 영조 51년 을미 1775) 향년 80세
金夢涑 (肅宗 22年 丙子 1696 - 英祖 51年 乙未 1775) 享年 80歲

       자계희  수통정대부 용양위부호군.   김이상(통덕랑) 삼자
       字季希  壽通大政夫 龍?衛副護軍.   金以?(通德郞) 三子
 


김두렴 (숙종 27년 신사 1701 - 정조 15년 辛亥 1791) 향년 91세
金斗濂 (肅宗 27年 辛巳 1701 - 正祖 15年 辛亥 1791) 享年 91歲

       자경첨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이감(증호조참판)차자
       字景瞻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金以鑑(贈戶曹參判)次子

 

김술렴 (숙종 33년 정해 1707 - 정조 16년 임자 1792) 향년 86세
金述濂 (肅宗 33年 丁亥 1707 - 正祖 16年 壬子 1792) 享年 86歲

       자술보  수가선대부.  김잠(대구교수)5대손  김이기(수동추)차자
       字述甫  壽嘉善大夫.  金潛(大邱敎授)五代孫 金以錡(壽同樞)次子

 

김주대 (숙종 29년 계미 1703 - 정조 17년 계축 1793) 향년 91세
金柱岱 (肅宗 29年 癸未 1703 - 正祖 17年 癸丑 1793) 享年 91歲

       자종지 호행졸재 수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  김몽수(생원)장자
       字宗之 號幸拙齋 壽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  金夢洙(生員)長子

 

김주문 (숙종 40년 갑오 1714 - 정조 21년 정사 1797) 향년 84세
金柱文 (肅宗 40年 甲午 1714 - 正祖 21年 丁巳 1797) 享年 84歲

       자문백  수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태렴(증장악원정)장자
       字文伯  壽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金泰濂(贈掌樂院正)長子

 

김주굉 (경종 2년 임인 1722 - 순조 7년 정묘 1807) 향년 86세
金柱宏 (景宗 2年 壬寅 1722 - 純祖 7年 丁卯 1807) 享年 86歲

       자경원 호지수재 수가선대부 첨지중추부사.  김몽엄 계자
       字擎遠 號止水齋 壽嘉善大夫 僉知中樞府事.  金夢淹 系子

 

김주일 (영조 1년 을사 1725 - 순조 19년 기묘 1819) 향년 95세
金柱日 (英祖 1年 乙巳 1725 - 純祖 19年 己卯 1819) 향년 95歲

       자광언  수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두렴(수동추)장자
       字光彦  壽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金斗濂(壽同樞)長子

 

김기수 (정조 10년 병오 1786 - 철종 11년 경신 1860) 향년 75세
金驥壽 (正祖 10年 丙午 1786 - 哲宗 11年 庚申 1860) 享年 75歲

       자덕노  수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  김종찬 장자
       字德老  壽通政大夫 僉知中樞府事.  金琮燦 長子

 

김영수 (정조 21년 정사 1797 - 고종 21년 갑신 1884) 향년 88세
金?壽 (正祖 21年 丁巳 1797 - 高宗 21年 甲申 1884) 享年 88歲

       자대령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시찬(증호조참판)차자
       字大齡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副事.  金時燦(贈戶曹參判)次子

 

김시집 (순조 1년 신유 1801 - 고종 23년 병술 1886) 향년 86세
金時集 (純祖 1年 辛酉 1801 - 高宗 23年 丙戌 1886) 享年 86歲

       자대여  수통정대부 용양위호군.  김침 8대손 김종열장자
       字大汝  壽通政大夫 龍?衛護軍.  金?八代孫 金宗烈長子

 

김익수 (순조 4년 갑자 1804 - 고종 23년 병술 1886) 향년 83세
金益壽 (純祖 4年 甲子 1804 - 高宗 23年 丙戌 1886) 享年 83歲

       자여겸  수통정대부 용양위호군. 김잠(대구교수) 8대손 김구찬장자
       字汝兼  壽通政大夫 龍?衛護軍. 金潛(大邱敎授)八代孫 金九燦長子

 

김경수 (순조 4년 갑자 1804 - 고종 31년 갑오 1894) 향년 90세
金坰壽 (純祖 4年 甲子 1804 - 高宗 31年 甲午 1894) 享年 90歲

       자순경  수통정대부 .    김잠(대구교수) 8대손 김정찬장자
       字舜卿  壽通政大夫 .    金潛(大邱敎授)八代孫 金鼎燦長子

 

김인수 (순조 7년 정묘 1807 - 갑인 1914) 향년 108세
金仁壽 (純祖 7年 丁卯 1807 - 甲寅 1914) 享年 108歲

       자인선  수통정대부 .   김잠(대구교수) 8대손 김덕찬장자
       字仁善  壽通政大夫 .   金潛(大邱敎授)八代孫 金德燦長子

 

김진호 (순조 2년 임술 1802 - 고종 18년 신사 1881) 향년 80세
金鎭浩 (純祖 2年 壬戌 1802 - 高宗 18년 辛巳 1881) 享年 80年

       자성연  수통정대부 .  김성월(수부호군) 5대손 김산수장자
       字聖淵  壽通政大夫 .  金聖鉞(壽副護軍)五代孫 金山壽長子

 

김  진 (순조 20년 경진 1820 - 고종 43년 병오 1906) 향년 87세
金  瑨 (純祖 20年 庚辰 1820 - 高宗 43年 丙午 1906) 享年 87歲

       자사연 호동암  수통정대부.  김침 9대손 김시덕장자
       字士鍊 號東巖  壽通政大夫. 金?九代孫 金時德長子

 

김진홍 (순조 31년 신묘 1831 - 고종 41년 갑진 1904) 향년 74세
金鎭洪 (純祖 31年 辛卯 1831 - 高宗 41年 甲辰 1904) 享年 74세

       자치구  수통정대부 .   김주곤증손 김연수 삼자
       字稚九  壽通政大夫 .   金柱崑曾孫 金蓮壽 三子

 

김진기 (헌종 1년 을미 1835 - 을축 1925) 향년 91세
金鎭箕 (憲宗 1年 乙未 1835 - 乙丑 1925) 享年 91歲

       자이범  수통정대부 .   김침 9대손 김시집차자
       字而範  壽通政大夫 .   金?九代孫 金時集次子

 

김부락 (순조 22년 임오 1822 - 고종 39년 임인 1902) 향년 81세
金富洛 (純祖 22年 壬午 1822 - 高宗 39年 壬寅 1902) 享年 81歲

       자윤환 호파수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김진학(증공조참판)장자
       字潤煥 號芭?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金鎭學(贈工曹參判)長子

 

김헌락 (순조 26년 병술 1826 - 고종 41년 갑진 1904) 향년 79세
金憲洛 (純祖 26年 丙戌 1826 - 高宗 41年 甲辰 1904) 享年 79歲

       자의서 호졸와  수통정대부. 김잠(대구교수) 9대손 김종원장자
       字義瑞 號拙窩  壽通政大夫. 金潛(大邱敎授)九代孫 金鍾元長子


김병연 (헌종 4년 무술 1826 - 병인 1926) 향년 89세
金秉淵 (憲宗 4年 戊戌 1826 - 丙寅 1926) 享年 89歲

       자문옥   수통정대부.   김잠(대구교수) 9대손 김진덕장자
       字文玉   壽通政大夫.   金潛(大邱敎授)九代孫 金鎭德장자

 

김한모 (순조 24년 갑신 1824 - 순종 1년 정미 1907) 향년 84세
金漢模 (純祖 24年 甲申 1824 - 純宗 1年 丁未 1907) 享年 84歲

       자문가   수통정대부.    김진국(정릉참봉)손 김일락장자
       字文可   壽通政大夫.    金鎭國(貞陵參奉)孫 金馹洛長子

 

김원모 (순조 28년 무자 1828 - 경술 1910) 향년 83세
金遠模 (純祖 28年 戊子 1828 - 庚戌 1910) 享年 83歲

       자성홍   수통정대부. 김주우 5대손 김정락장자
       字聖弘   壽通政大夫. 金柱宇五代孫 金鼎洛長子

 

 

증  직(贈  職)을  받은 분

 

 공신(功臣), 충신(忠臣), 효자(孝子) 및 학덕(學德)이 높은 사람들에게 
  사(死)후에 벼슬을 주거나 높혀주던 직이다.

 

김성일 (중종 33년 무술 1538 - 선조 26년 계사 1593)
金誠一 (中宗 33年 戊戌 1538 - 宣祖 26年 癸巳 1593)

       자사순 호학봉  가선대부 경상도관찰사  증자헌대부 이조판서
       字士純 號鶴峯  嘉善大夫 慶尙道觀察使  贈資憲大夫 吏曹判書
       시 문충공  증판서 김진(호청계) 제사자
       諡 文忠公  贈判書 金璡(號靑溪) 第四子

 

김시적 (인조 1년 계해 1623 - 현종 12년 신해 1671)
金是? (仁祖 1年 癸亥 1623 - 顯宗 12年 辛亥 1671)

       자자신 증통정대부 사복시정.  김잠 사자 [증손 김이릉(수가선)귀]
       字子愼 贈通政大夫 司僕寺正.  金潛 四子 [曾孫 金以?(壽嘉善)貴]

 

김  귀 (광해군 2년 경술 1610 - 인조 14년 병자 1636)
金   (光海君 2年 庚戌 1610 - 仁祖 14年 丙子 1636)

       자소명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증손 김두렴(수가선)귀]
       字昭明  贈通訓大夫 掌樂院正.   [曾孫 金斗濂(壽嘉善)貴]
       좌랑 김시권(호봉파) 장자
       佐郞 金是權(號鳳坡) 長子

 

김  찬 (효종 3년 임진 1652 - 숙종 21년 을해 1695)
金  燦 (孝宗 3年 壬辰 1652 - 肅宗 21年 乙亥 1695)

       자유광  증통정대부 승정원 우승지.  [손 김이릉(수가선)귀]
       字有光  贈通政大夫 承政院 右承旨.  [孫 金以?(壽嘉善)貴]
       증 사복시정 김시적 장자
       贈 司僕寺正 金是? 長子

 

김계기 (인조 11년 계유 1633 - 숙종 45년 기해 1719)
金啓基 (仁祖 11年 癸酉 1633 - 肅宗 45年 己亥 1719)

       자덕보  수절충장군 용양위부호군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字德甫  壽折衝將軍 龍?衛副護軍  贈通政大夫 戶曹參議
       [손 김두렴(수가선)귀]  증장악원정 김귀 차자
       [孫 金斗濂(壽嘉善)貴]  贈掌樂院正 金 次子

 

김유기 (인조 27년 기축 1649 - 영조 6년 경술 1730)
金由基 (仁祖 27年 己丑 1649 - 英祖 6年 庚戌 1730)

       자부경  돈용교위  증가선대부  [자 김이명(수동추)귀] 김위 장자
       字富卿  敦勇校尉  贈嘉善大夫  [子 金以銘(壽同樞)貴] 金? 長子

 

김서기 (숙종 26년 경진 1700 - 영조 45년 기축 1769)
金胥基 (肅宗 26年 庚辰 1700 - 英祖 45年 己丑 1769)

       자군택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자 김이릉(수가선)귀]
       字君宅  贈嘉善大夫 工曹參判  [子 金以?(壽嘉善)貴]
       승정원 우승지 김찬 장자
       承政院 右承旨 金燦 長子

 

김이감 (현종 8년 정미 1667 - 영조 22년 병인 1746)
金以鑑 (顯宗 8年 丁未 1667 - 英祖 22年 丙寅 1746)

       자명중  수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字明仲  壽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자 김두렴(수가선)귀]  증호조참의 김계기 차자
       [子 金斗濂(壽嘉善)貴]  贈戶曹參議 金啓基 次子

 

김명흠 (숙종 22년 병자 1696 - 영조 49년 계사 1773)
金命欽 (肅宗 22年 丙子 1696 - 英祖 49年 癸巳 1773)

       자백해 호옥계  증통훈대부 사헌부감찰 [효행 고종 23년 1886]
       字伯諧 號玉溪  贈通訓大夫 司憲府監察 [孝行 高宗 23年 1886]
       김한기 장자
       金漢基 長子

 

김태렴 (숙종 20년 갑술 1694 - 영조 31년 을해 1755)
金泰濂 (肅宗 20年 甲戌 1694 - 英祖 31年 乙亥 1755)

       자앙여 호매오  증통훈대부 장악원정  [자 김주문(수통정)귀]
       字仰餘 號梅塢  贈通訓大夫 掌樂院正  [子 金柱文(壽通政)貴]
       증호조참판 김이감 장자,        贈戶曹參判 金以鑑 長子,

 

김이찬 (영조 21년 을축 1745 - 정조 6년 임인 1782)
金利燦 (英祖 21年 乙丑 1745 - 正祖 6年 壬寅 1782)

       자이삼  증통훈대부 군자감정 [증손 김부락(수가선)귀] 김주건 차자
       字以三  贈通訓大夫 軍資監正 [曾孫 金富洛(壽嘉善)貴] 金柱建 次子

 

김시찬 (영조 44년 무자 1768 - -순조 14년 갑술 1814)
金時燦 (英祖 44年 戊子 1768 - -純祖 14年 甲戌 1814)

       자      증가선대부 호조참판    [자 김영수(수가선)귀]
       字      贈嘉善大夫 戶曹參判    [子 金?壽(壽嘉善)貴]
       수통정 김주문 차자
       壽通政 金柱文 次子

 

김영수 (영조 46년 경인 1770 - 헌종 13년 정미 1847)
金泳壽 (英祖 46年 庚寅 1770 - 憲宗 13年 丁未 1847)

       자성로  증통정대부 호조참의    [손 김부락(수가선)귀]
       字聖老  贈通政大夫 戶曹參議    [孫 金富洛(壽嘉善)貴]
       증군자감정 김이찬 장자
       贈軍資監正 金利燦 長子

 

김진학 (정조 20년 병진 1796 - 헌종 8년 임인 1842)
金鎭學 (正祖 20年 丙辰 1796 - 憲宗 8年 壬寅 1842)

       자학이  증가선대부 공조참판  [자 김부락(수가선)귀]
       字學利  贈嘉善大夫 工曹參判  [子 金富洛(壽嘉善)貴]
       증호조참의 김영수 장자
       贈戶曹參議 金泳壽 長子

 

문집(文集)을 내신 분

 

-준비중-

 

 

검제(金溪) 마을의 항일(抗日) 구국활동(救國活動)독립운동(獨立運動) 포상자(褒賞者)

 

김진의(金鎭懿)

(哲宗 7年 丙辰 1856 - 丙寅 1926)
자는 미경(美卿)이고 호는 학운(鶴雲)이다. 학봉의 10대손이며 김평수(金平壽)의 5자이다.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문하에서

수학하여 고종 19년(188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비서감(秘書監)에 올랐다.

고종 33년(1896) 1월 안동에서 의병진(義兵陣)을 정비할 때 김도화(金道和)를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유창식(柳昌植), 유일우(柳馹佑),

 권철연(權徹淵) 등과 함께 천출(薦出)과 주청(奏請)을 맡아 의진의 간부를 선임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또한 그해 7월에는 김도화

 의진의 척후장(斥候將)으로 활동하였다. 1926년(丙寅) 3월 8일에 하세하니 향년(享年)이 71세이다.
2004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포장(建國?章)이 추서되었다.

 

김흥락(金興洛)

(순조 27年 丁亥 1827 - 高宗 36年 己亥 1899)
자는 계맹(繼孟)이고 호는 서산(西山)이다. 학봉의 11대 주사손으로 능주목사(綾州牧使)를 지낸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의

장자이다. 정재(定齋) 유치명(柳致明) 문하에서 수학하고 퇴계학의 연원정맥(淵源正脈)을 계승한 대유학자이다.

영남의 상징적 인물로 추앙을 받아 조정에서 여러번 관직을 내렸으나 출사하지 않고, 평생을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하였다.

고종 31년(1894) 7월에 특지로 승정원 우부승지에 제수되고, 동년 8월에는 다시 영해부사(寧海府使)에 제수되었으나 한 번도

나아가지 않았다.
고종 32년(1895)에 일제가 국모인 명성황후(明成皇后)를 시해한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공은 제자 100여명과 함께 서후면 태장(台庄)에

 있는 대찰 봉정사(鳳停寺)에 들어가 머리를 풀고 망곡(望哭)을 하며 일제에게 원수를 갚을 것을 맹서하고 12월에는 의병봉기를

촉구하는 전국 최초의 격문인 “안동통문(安東通文)”을 영남의 유림에 돌렸다.

그 후 곧 바로 의병을 모집하여 수백명의 의병들이 안동 관찰부(觀察府)를 공격하여 12월 3일에 안동부를 점령하였고 안동향교에

의병지휘소인 “도창의소(都倡義所)”를 설치하여 의병을 총지휘하였다. 그 후 공은 69세의 고령인 관계로 성대(星臺) 권세연(權世淵)을

 의병대장에 임명하고 1896년 1월에는 의병지휘소를 교체하여 척암(拓庵) 김도화(金道和)를 의병대장에 추대하여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 후 노구를 무릅쓰고 의병을 지휘하였고, 문하에서 기라성 같은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60여명 배출하였다. 또 학문연구와 전통수호에

 전념하였으나 국가존망의 위기가 닥치는 참담한 현실을 직면하자 떨치고 일어나 유생들을 총동원하여 구국투쟁의 최일선에 나서는

 기개를 보였다.
고종 36년(1899) 10월 11일에 하세하니 향년이 73세였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회락(金繪洛)

(憲宗 10년 甲辰 1844 - 高宗 33年 丙申 1896)
자는 경승(景升)이고 학봉의 11대 손이며 승정원 동부승지를 지낸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의 차자이다.
1896년에 안동 의병진에 가담하여 포장(砲將)으로 옹천(甕川) 전투에 가담하여 활약하였다. 족숙인 김진의와 함께 종가(宗家) 다락에

 숨어 있다가 다음날인 7월 22일(陰 6月 12日) 새벽 안동부 병대(兵隊)에 체포되었다. 안동부에 들어서자 병대장은 공을 향하여 잘못을

 뉘우치라고 요구하며 총으로 위협하였지만 공은 이를 나무라며 항거하다가 총살당하였다.

순국하면서 부인에게 “보수(報?, 원수를 갚음)를 가르쳐라.”고 고함치면서 총에 맞아 피가 흐르자 “이 피(血)가 어떤 피인데 이렇게

흘릴 수가 있나?” 하며 도포자락으로 피를 감싸 안으며 순국하니 향년이 53세였다

.
2001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병락(金柄洛)

(哲宗 1年 庚戌 1850 - 丙寅 1926)
자는 언직(彦直)이고 호는 취석(翠石)으로 초명은 호락(浩洛)이다.
학봉의 11대 손이며 간오(艮塢) 김진만(金鎭萬)의 장남이다.

고종 9년(1905) 을사조약 이후 안동을 중심으로 경북 북부지역에서 활약한 유시연(柳時淵) 의병진에 가담하여 이듬해 10월 26일에

동지 5, 6명과 함께 예안에 있는 일본군 분파소를 습격하는 등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이 사건으로 일본군에 체포되어 1907년 5월 4일에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독립운동을 계속하다가 병인년(1926) 3월 18일에 하세하니 향년이 77세이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공훈록에는 초명인 김호락으로 기재되어 있다.

 

김준모(金濬模)

(憲宗 11年 乙巳 1845 - 高宗 33年 丙申 1896)
자는 덕심(德深)이고 호는 송오(松塢)이다. 학봉의 12대손이며 김탁연(金?淵)의 장남으로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고종 32년(1895) 을미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자 안동의병이 조직될 때 가담하였고, 이듬해 3월 7일 안동의병의 지휘부 개편시

 서기로 참여하여 금계동에 살고 있는 의성김씨 문중의 단합과 의병을 일으키는데 공로가 있었으며, 3월 초 의병진의 소모장의

명을받아 포정(砲丁) 1대와 인마(人馬) 70구를 거느리고 의성군(義城郡) 비안(比安) 도리원(挑梨院) 전투에서 일본군과 교전 중

순국하니 향년이 52세이다.
2006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윤모(金潤模)

(憲宗 13年 丁未 1847 - 高宗 34年 丁酉 1897)
자는 경능(敬能)이다.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한 김진우(金鎭右)의 장손이다.

족숙(族叔)인 서산(西山) 김흥락(金興洛) 공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고종 32년(1895)에 일제가 국모인 명성왕후(明聖王后)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날 때 호계서원(虎溪書院)의 재유사(齋有司)로서 호계통문의 발의를 주도하였으며, 안동의진의

정제유사(整齊有司)에 선임되어 안동의진의 결성과 의병활동을 주도하였다.

고종 34년(1897) 6월 12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1세이다.  2008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포장(建國?章)이 추서되었다.

 

김병동(金秉東)

(哲宗 9年 戊午 1858 - 己巳 1929)
자는 중함(仲涵)이고 호는 청곡(靑谷)이다. 학봉의 12대 손이며 김의연(金義淵)의 장자로 예천군(醴泉郡) 감천면(甘泉面) 포동

(浦洞)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천자가 온아(溫雅)하고 단결(端潔)하며 불의에 굴하지 않는 지조를 가졌다. 엄격한 부친의

가르침으로 학업에 전념하고 다시 족형인 미서(薇西) 김필모(金泌模)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에 운강(雲崗) 이강년(李康?) 의병진에 들어가 충청도(忠淸道)의 단양(丹陽), 제천(提川), 연풍(延豊), 청풍(淸風)과 강원도

(江原道)의 영월(寧越), 강릉(江陵), 원주(原州) 등지와 경상도(慶尙道)의 문경(聞慶), 예천, 영주(榮州), 봉화(奉化), 안동 등지에서

결사 분전하여 수많은 왜적을 토벌하는 전과를 올렸다.

1908년 6월 청풍 전투에서 이강년이 관통상을 입고 체포되어 9월 19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교수형으로 순국하니, 공은

기울어져가는 국운을 회복코져 배일사상 고취에 전념하였고, 삼일운동 발발 전후하여 지하 조직망으로 군자금을 조달하여 전국

곳곳에서 시위를 지휘하여 봉기하였다.

1922년에는 의용대를 조직하여 재무총장으로 활약하였다. 이 해 10월 독립 군자금을 모금하던 중 의용단 사건으로 동지 36명과 함께

 일경에 체포되어 갖은 고문을 당하고 1년 8개월의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후에도 강원도, 충청도, 만주(滿洲)

등지로 전전하면서 계속 독립운동을 하던 중 일경의 모진 고문과 옥고로 인한 후유증으로 병을 얻어 기사년(1929) 3월 12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2세이다.
1991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익모(金翊模)

(哲宗 9年 戊午 1858 - 乙亥 1935)
자는 여함(汝涵)이고 호는 응암(鷹庵)이며 초명은 양모(瀁模)이다. 학봉의 12대손이며 운포(雲圃) 김경락(金景洛)의 차자로 태어나

겸와(謙窩) 김진형(金鎭衡)의 장자인 김세락(金世洛)의 계자(系子)로 입후하였다.

천자가 총명 영민하고 풍도가 영준하였다. 어릴 때부터 서산 김흥락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가세가 빈한하여 학업을 닦으면서 집을

부흥시키려고 노력하여 중년에 이르러 완전히 가세를 일으켰다. 위선사업에 최선을 다하여 임천서원(臨川書院) 복설에 혼신의 힘을

 써서 서울에 1년 반을 체류하면서 기어이 장례원(掌隷院)의 재가를 얻고 돌아왔다.

병신년(1896)에 안동유림에서 의병이 일어나니 분연히 일어나 열읍에 소모의 일을 보살피기도 하였다. 을미년(1919)에 영남유림이

궐기하여 불란서 파리에서 열리고 있는 만국 평화회의에 한국 독립청원서를 내기로 하였는데 공은 솔선하여 서명하였다.

(파리장서에는 처음 이름인 김양모로 서명하였다.)

을해년(1935) 12월 29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8세이다. 1996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포장(建國?章)이 수여되었다.

 

김세동(金世東)

(高宗 7年 庚午 1870 - 壬午 1942)
자는 성칙(聖則)이고 호는 심대(心臺)이다. 학봉의 12대 손이며 취석 김병락(建國勳章 愛國章)의 장자이다.

풍채가 준수하고 어릴 때부터 명성이 높았다. 무슨 글이나 한번보면 잊어버리지 않았으며 무슨 책이나 읽지 않는 것이 없고, 붓을 들면

 수천 수만어의 장문이라도 일필휘지하였다. 음직으로 사릉참봉(思陵參奉)을 역임하였다.

경술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비분강개하여 국권을 회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하였다. 일제의 총독정치가 시작되고 소위 묘적법

(墓籍法)을 시행하였을 때 공은 수천언의 장서를 써서 단독명의로 조선총독부에 제출하였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징역 1년형의

선고를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문중 자제들의 후진양성에 온 정력을 기우렸다. 그 뒤 상해 임시정부로 밀행하려다 일경에 발각되어 재차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이 때 가택수색을 수차례나 받고 그때까지 지은 시문고(詩文稿) 두 상자를 전부 탈취 당하여 안동경찰서 마당에서

소각 당하였다.

임오년(1942) 6월 21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73세이다.  1993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김현동(金賢東)

(高宗 13年 丙子 1876 - 丙寅 1926)
자는 회문(繪文)이고 호는 의정(義正)이다. 학봉의 12대 손이며 김영락(金英洛)의 차자로 태어나 김진륜(金鎭綸)의 계손(系孫)으로

입후하였다.
1907년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 휘하에서 김의성(金義城)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의 밀명으로

 경상도 지역에 비밀 결사 의용단을 조직하여 간사로 활약하였다. 경북일대의 부호가에게 출금통지서(出金通知書)를 발송하는 등

계속 군자금 모집활동을 하다가 일경에 체포되어 10개월에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르고 1923년 9월에 출옥하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지하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병인년(1926) 6월11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1세이다. 1983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원식(金元植)

(高宗 26年 己丑 1889 - 庚辰 1940)
자는 계서(繼緖)이고 호는 소창(笑蒼)이다. 행촌(杏村) 김시강(金是?)의 10대 손이며 김종락(金鍾洛)의 장자이다.
천자가 영민하고 재분(才分)이 초일(超逸)하여 경사에 통달하였다.

족형인 가산(柯山) 김형모(金瀅模)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갑오경장이후에 신풍조가 들어오니 신학문도 연구하여 세계대세를
통찰하였다. 경술
년(1910)에 나라가 망하니 비분강개하여 문을 닫고 통곡하였다.

만주에 망명하여 선배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과 족형인 일송(一松) 김동삼(金東三)과 비밀리에 연락하고 만나서 서로군정서에

 가담하여 실무를 담당하였다. 그 후 국내에 동지를 파견하여 군자금을 모집하고 새로 들어오는 교포들을 정착할 수 있도록
주선하는 등
 동분서주하였다.
1925년에는 정의부(政義府)에 들어가 중앙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1928년에는 일송 김동삼과 이청천(李靑天), 김좌진(金佐鎭) 등

동지와 상의하고 임시 혁신의회를 조직하여 중앙 집행위원장에 선임되어, 일제 주구(走狗)들의 투쟁에 전념하여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931년에 만주사변이 일어나니 독립운동가의 박해는 더욱 심해지고 체포 학살이 자행되는 등 만주에서 활약하던 독립지사는 발붙일

곳이 없었다. 이때 공은 몸을 피하기 위하여 변장하고 북경으로 이동하던 중 밀정의 신고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2년형을 선고받고

 간도 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출옥 후 한중(韓中) 항일(抗日) 의용군을 조직하여 한중 연합전선을 펼쳤다. 다시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을 창당하여 새로운 정세에

대응한 독립운동을 전개하다가 기묘년(1939) 12월 26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1세이다. 1968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김동식(金東植)

(高宗 33年 丙申 1896 - 庚寅 1950)
자는 춘약(春若)이고 봉직랑(奉直郞) 김침(金?)의 11대 손이며 김대락(金大洛)의 장자로 봉화군(奉化郡) 법전면(法田面) 소천리

(召川里)에서 태어났다.

1926년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등이 만주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자금을 모집하고자 국내로 파견한 동생인 김화식

(金華植)과 만나 자금 모집활동을 전개하였다.

김화식이 서울에서 자금 모집활동을 하다 원동(苑洞)에서 체포될 때, 김화식이 소지했던 권총을 은익하기 위하여 휴대 소지하였다가

소위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약 1년간의 옥고를 치렀다.

이후 공은 동생인 김화식의 옥중생활 및 독립운동을 지원하였으며, 고향에서 청년들을 대상으로 독립사상을 고취시키는데 힘을
쏟았다. 
 경인년(1950) 7월 14일 별세하니 향년이 55세이다.

2005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대통령 표창이 추서되었다.

 

김화식(金華植)

(高宗 37年 庚子 1900 - 庚寅 1950)
자는 춘서(春瑞)이고 호는 백도(白島)이다. 봉직랑 김침의 11대 손이며 김대락의 차자로 김동식(대통령 표창)의 동생이다.
기미년(1919)에 삼일운동이 일어나니 지방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하고 불란서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 평화회의에 보내려는 유림단의

조선 독립청원서를 가지고 상해로 들어갈 때 심산 김창숙과 함께 동행하여 많은 일에 협력하였다.

그 후 1924년 3월에 김창숙이 만주, 몽고등지에 황무지를 개간하여 국내의 청년들을 이주시켜, 둔전식(屯田式) 군사훈련을 쌓으려는

계획을 수립하는데 많은 협력을 하였다.

다시 국내에 돌아와서 한국 독립혈사(獨立血史)를 가지고 영남 유림의 부호가를 찾아가서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일경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징역형을 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계속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경인년(1950) 8월 15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51세이다. 1990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연환(金璉煥)

(高宗 18年 辛巳 1881 - 癸未 1943)
자는 기중(器仲)이고 호는 학운(鶴雲)이다. 겸와 김진형의 증손으로 응암 김익모(대통령 표창)의 차자이다.
기우(氣宇)가 흥양(興陽)하고 기품이 준수하며 의표가 당당하고 언론이 유창하였다. 백부인 가산(柯山) 김형모(金瀅模)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나 자유분방한 기질을 순화하려고 많은 교도를 받았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하여 봉천시(奉天市) 소남문(小南門)에 근거를 마련한 후 천성여관(天城旅館)을 중심으로 주로 국내와의 연락과

폭탄을 만주와 국내에 공급하여 의열투쟁에 사용하도록 하는 중책을 담당하였다.

1919년에는 고종황제 인산(因山)에 참여하려는 봉천 거류민 단원 80여명을 인솔하고 서울에 들어와 독립 만세운동에 참가하였다.
1920년 1월 상해 임시정부에 가서 심산 김창숙을 만나고 국내에 돌아와서 군자금 모집에 활약하고 다음해 영남으로 내려가 각지를

순회하면서 유림들에게 독립운동 사상을 고취시키고 활약하던 중 2월 29일 상주(尙州)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1922년 출옥 후 다시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활약하였으며 다음 해 1월 서로군정서에 가입하고 다시 국내로 돌아와 독립 군자금을

 모집하던 중 동지들의 검거사건이 일어나자 즉시 중국으로 다시 건너갔다. 1924년 서울에 돌아와 계속 지하 독립운동에 활약하다가

계미년(1943) 2월 22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63세이다.

1977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용환(金龍煥)

(高宗 24年 丁亥 1887 - 丙戌 1946)
자는 여현(汝見)이다. 김응걸(金應杰)의 장자로 태어나 김응모(金應模)의 계자(系子)로 입후하니 학봉의 13대 주사손이다.
어릴 때부터 조부인 서산 김흥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다시 숙도(叔度) 최환(崔桓) 문하에서도 수학하였다.

1906년 족인(族人)인 김현동(金賢東), 김규헌(金奎憲)과 함께 의병대장 운강(雲崗) 이강년(李康?)의 의병진에 입단하여 안동, 영양

(英陽), 예천(醴泉), 문경(聞慶), 봉화(奉化), 제천(提川) 전투에 참가하였다. 1908년 4월에는 백우(白愚) 김상태(金尙台)의
의병대장진에
 들어가 3년 동안 영월(寧越), 정선(旌善), 영주(榮州), 예천 등의 전투에 참전하여 많은 공을 세웠다.

1915년 1월 김찬규(金燦奎), 김현동 동지와 함께 만주로 들어가 존고종형(尊姑從兄)인 석주(石洲) 이상룡(李相龍)을 만나 국내
의병활동
 상황을 보고하였다. 1919년에는 독립 군자금을 만주에 있는 이상룡에게 전달하기 위하여 족인 김원식 지사와 만주로
가던 중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일경에 체포되어 신의주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보름만에 석방되었다. 그러나 김원식은 상복(喪服)
차림으로
무사히 압록강을 건너 이상룡에게 군자금을 전달하였다. 그 후 의용단을 조직하여 신태식(申泰植)을 단장으로 세우고
공은 서기를 맡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만주에 있는 이상룡에게 전달하는 등 계속 활동을 하였다.

1922년 12월에 군자금 모집을 위해 활동하던 중 의용단 사건으로 신태식 단장을 비롯한 36명이 일경에 체포되어 투옥될 때 공도 같이

 체포되어 9개월의 징역형을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출옥 후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전면에서 활동을 하지 못하고 김병동, 김연환, 김현동, 김규헌, 하중환(河中煥) 등 측근을 앞세워

비밀리에 독립운동을 지휘하였다. 이후에도 광복운동을 계속하다가 광복되던 이듬해 1946년 5월 29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60세이다.

1995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김규헌(金奎憲)

(고종 23年 丙戌 1886 - 庚戌 1970)
자는 치방(致邦)이고 호는 속은(俗隱)이다. 정릉참봉(貞陵參奉)을 지낸 유유헌(悠悠軒) 김진국(金鎭國)의 현손으로 김성환(金聲煥)의

 장자이다. 족조(族祖)인 가산 김형모의 문하에서 수학하였고 경술년(1910) 이후 안동 금계(金溪)에서 상주군 화북면(化北面) 상오리

(上五里)에 이주하여 비밀리에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열열히 활동하였다.

처음에는 운강 이강년 의병진에 참가하여 활약하였고, 1922년 6월에는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정서의 지령에 의하여 경상남북도를

 중심으로 군자금 제공 명령서를 각 지방 부호가에게 발송하고 자금을 모집하여 만주로 송금하였다. 그러나 서로군정서 총재 이상룡이

 국내로 파견한 김찬규가 체포됨으로 그 전모가 들어나 이해 12월에 공도 체포되어 무수한 고문을 받고 징역 1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출옥 후에도 비밀리에 독립 군자금을 모집하고 지하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광복 후 고향에서 여생을 보내다가 경술년

(1970) 4월 7일에 별세하니 향년이 85세이다.

1986년 정부로부터 공훈이 인정되어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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